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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줄 이야기

지는 해가 좋다. 잠시 동안이지만 그 밝음을 거두어, 작은 것들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양보하는 게 마음에 든다. 해는 커다란 돌멩이에 불과했던 달에게 새하얀 옷을 빌려주고, 멀리서부터 달려온 별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채 남겨둔다. 그렇게, 배려로 세상은 어두워진다. 이젠 작은 것들의 시간이다. 서로 더 밝게 빛나기 위해 그들은 경쟁하며 타오른다. 타닥타닥하고 빛나는 소리가 위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저마다의 색을 지닌 빛이 마침내 지상에 도래하고 나면 따닥따닥, 점묘화는 완성된다. 우리는 운 좋게도 우연히 감상할 뿐이다. 작은 것들이 고대해 온 꿈의 무대를. 그들의 넘치는 자신감을. 다른 곳에서 시작된 빛들은 우리네 세상에서 서로를 닮아간다. 이카루스의 모험담이 말해주듯, 태양은 인간사..

일상/아무말 2025.06.03

마음

마음이 터질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는 표현은 로맨틱하지만 이기적이다. 나의 마음은 세상 홀로 존재하는 나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자리 잡은 그것은 스스로의 존재 안에서 연거푸 되새김질을 거쳐 과할 정도로 정당화되지만, 그 표출로 인해 영향받는 세상은 나의 밖에 있다.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신경 쓰지 않고 나만 생각해서 하는 행동은 좋아야 용기고, 대개 치기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처럼 부풀고 커지는 게 이 세상 또 어디 있을까. 연인들이 서로를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건, 다분히 헛소리로 치부할 만한 건 아닐 게다. 특히 사랑과 미움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힘이 강한데, 이는 보통 다른 이를 향해 소비된다는 점에서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다른..

일상/아무말 2024.12.28

오목

요즘엔 시간이 날 때마다 오목을 둔다. 핸드폰으로 할 수 있어 접근성도 좋지만, 오목은 게임이라고 부르기에 조금 정적이지 않나 하는 어린 생각에, 더 마음 편하게 Play 버튼을 누르는 것 같다. 등급은 6급으로 결코 높지 않다. 승률이 50%에 다다르면 당신도 자연스레 6급 한 켠에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신기한 건 이 앱을 즐기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것인지 기억나는 이름들을 다시 마주할 때가 있다는 거다. 이는 평소에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승기가 내 쪽으로 기울게 되면 할 수 있는 감정표현을 아끼지 않기에, 방금 골려준 사람을 곧바로 다시 만나는 불편한 상황이 만들어지곤 한다. 그러면 나는 하던 일도 멈추고 그 어느 때보다 심혈을 기울여서 승부에 임한다. 지면 겪게 될 결과를 ..

2년

시간은 기억을 거르는 체와 같아서 우리가 지난날에 잠식되지 않도록 멈추지 않고 흐른다. 하나둘씩 시간 위에 밭쳐진 기억들은, 흘러가는 시간에 이리저리 치여 서서히 마모되고 쪼개진다. 시간의 틈을 감당할 수 없을 때까지 몸집이 줄어들면 그것은 결국 저 편으로 낙하하게 되는데, 이것이 단편적인 기억들이 우리의 뇌리에 순간만 자리하는 이유이다. 그렇지 않으면 떨어지는 건 기억이 아닌 우리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기억이 바스라지는 건 아니다. 걔 중에는 단단하고 견고하여 궂은 시간의 풍화에도 그 모습을 유지하는 것들이 있다. 시간 위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산산조각나고마는 기억들과 달리, 그것은 오히려 연마를 거쳐 고고히 그 빛을 발한다. 그러한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우리는 추억이라 부른다. 시간 위에 모..

일상/아무말 2024.11.21

밤은 고독한 나만의 시간이다. 하루동안의 근심이 쌓이다 무너지는 때이고, 아직 오지않은 걱정에 괜스레 침울해질 침묵의 때다. 함께할 때에는 신기하게도 볼 수 없었던 불안과 걱정들이, 작은 방 안의 세상에 홀로 남으면 내 시야에 불쑥 떠오른다. 겁이, 겁이 너무 난다. 마음을 다잡고 검은 것들을 치우려고 해봐도, 그것들은 끊임없이 나를 조롱하고 멸시한다.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저 작은 아이일 뿐이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다. 귀를 막아도 들리는 이 공허한 소리는, 이내 방 안에 가득 차오른다. 나만이 들을 수 있는 거센 고문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기쁠 때나 힘들 때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데, 나는 기쁠 때보다도 힘들 때 더 그렇다. 무기력하게 웅크리고 있노라면, 누군가 내 ..

일상/아무말 2024.11.02

안녕

간단한 인사조차 할 수 없는 나는 안녕할 자격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누군가를 이용하고, 시샘하고, 미워하는 나란 존재는 어른이라는 이상의 대척점에 서있음을 이미 알고 있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기보다, 슬프게 만드는데 더 소질이 있는, 흉한 나란 존재의 소멸이 가져올 무게에 대해 역시 이미 알고 있다. 시험을 망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러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에둘러 멀리 돌아왔다. 시험 중에 타종이 여러 번 울렸다든가, 시험 장소가 상정하지 않았던 중학교로 바뀌어 책상이 작았다든가 하는 사소한 이유를 포함하여 수많은 변명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모든 게 소용없었다. 비록 주어진 우연과 운명을 뒤바꿀 능력은 없었지만,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 정도는 내 손을 통해 선택할 수 있었다. ..

일상/아무말 2024.08.06

2

토끼를 잡았다. 우연이었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덫에 잡힌 것을 나는 가로챘을 뿐이다. 하얀 눈발 속에 하얀 그것을 하마터면 알아채지 못할 뻔 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은 빨간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다리에 걸린 올가미를 풀어줄 것이라 기대하는걸까. 도망가려 애쓴 탓에 다리는 상처투성이였다. 내가 주저앉자, 그것은 움직임을 멈췄다. 나의 눈과 그것의 눈이 같은 시선에서 맞닿는다. 서로의 동공에 비춘 모습은 무엇일까. 나는 오른손의 주머니칼을 움켜쥐었다. 척수를 끊으면 순식간에 생명은 꺼진다. 영혼과 상관없이 뿜어져나오는 피를 막는다. 서두르지 못해 얼굴에 피가 튄다. 머리와 몸을 떼어놓는다. 항문 조금 밑에 칼집을 내면, 가죽을 쉽게 벗길 수 있다. 두 다리를 위로 향한 채 밑으로 가죽을 세게 당긴다..

일상/아무말 2024.07.30

여우비

여우비야, 그쳐 다오. 나는 너를 마음에 담을 여유가 없단다. 맑은 하늘 내리는 너를 보고 신기함보단 당황이 앞서는 내가 되었다. 이젠 그 설움 풀어내고 뚝 그쳐 다오. 나는 우산도, 외투도 없는 초라한 사람이 되었단다. 너를 마주한 어색함에, 너를 기억하지 못함에 부디 서운해하지 말아 다오. 적어도 내게 얼굴은 비추어, 망각에 미안해 할 수 있도록 내게 해명할 기회를 주길 바란다. 여우비야, 그럼에도 나는 네가 고맙단다. 나는 요 근래 눈물 흘리지 못했다. 짜디 짠 그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면, 모래성에 물이 닿아 산산조각 나듯 스스로가 무너질 것만 같아 꾹 참고 속으로 버텨냈다. 생각을 비우고, 마음을 비워내면 공허하고 미천한 내 몸뚱이만 남아 힘든 일들은 지나칠 수 있게 되리라 굳게 믿었다. 시간이..

일상/아무말 2024.07.27

1

천지를 눈이 덮었다. 뽀드득뽀드득 소리는 그림자처럼 나를 뒤따른다. 온 시야가 하얗다. 마치 세상에 다른 색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이얀 색은 스스로를 뽐내고 있었다. 주변에 들리는 소리의 종류는 어느새 손으로 셀 수 있게 되었다. 나무가 흔들리며 부대끼는 소리, 걸어다니는 짐승들의 울음소리, 몸 안팎으로 오며 가는 공기소리, 그리고 눈이 흩날리는 소리는 지금 귀에 들리는 전부이다. 이전이라면 들을 수 없었을 소리에 눈을 감고 귀 기울여본다. 그러면 나는 새삼스레 떠나왔음을 실감한다. 오늘도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저 걷고 걸을 뿐이다. 시야 귀퉁이에 들어온 낡은 오두막에 잠시 몸을 피한다. 눈 섞인 바람에 볼과 귀가 빨개진 참이었다. 조금은 따듯한 곳에 들어오자, 바람..

일상/아무말 2024.07.08

넋두리

요즘은 화가 많다. 공부도 안 되고, 더위에 몸도 따라주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건 들숨과 날숨뿐이니, 저 창문 옆 붙어있는 날벌레와 나는 다른 게 무엇인가 생각한다. 차이점을 찾지 못함에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든다. 알람을 뒤로 미루고는 핸드폰을 저 멀리다 둔다. 눈을 감으며 생각한다. 자존감은 이미 바닥이다. 거절로 점철된 나의 세상은 이제 거뭇거뭇해져서, 새까맣고 끈적인다. 아무리 빛을 비추어도 안이 보이지 않는 건, 그 속이 하염없이 깊기 때문이며, 보이는 그 검은색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게 없다. 밥은 대충 때운지 오래다. 게임은 죄책감에 즐겁지 않다. 운동은 더위와 궂은 날씨에 할 수 없다. 공부는 내게 놀이가 아닌 업이다. 달은 보이지 않는다. 그 무엇도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싫어하..

일상/아무말 2024.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