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고독한 나만의 시간이다. 하루동안의 근심이 쌓이다 무너지는 때이고, 아직 오지않은 걱정에 괜스레 침울해질 침묵의 때다. 함께할 때에는 신기하게도 볼 수 없었던 불안과 걱정들이, 작은 방 안의 세상에 홀로 남으면 내 시야에 불쑥 떠오른다. 겁이, 겁이 너무 난다. 마음을 다잡고 검은 것들을 치우려고 해봐도, 그것들은 끊임없이 나를 조롱하고 멸시한다.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저 작은 아이일 뿐이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다. 귀를 막아도 들리는 이 공허한 소리는, 이내 방 안에 가득 차오른다. 나만이 들을 수 있는 거센 고문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기쁠 때나 힘들 때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데, 나는 기쁠 때보다도 힘들 때 더 그렇다. 무기력하게 웅크리고 있노라면,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으면 하는 충동이 차오른다. 나와 함께한다면 기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그저 내가 바라는 건 너는 해낼 수 있다고 다독여주는 한 마디다. 들을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오늘 첫 출근한 곳에서 도망쳤다.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있다 갑작스레 한 선택이었다. 여기서는 일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문자를 남기며 서둘러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곧바로 문자와 전화가 왔지만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차단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식은땀이 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애매모호한 존재로 남아있었다. 공부를 하려면 당장 시작해야 하는데 해낼 수 있을까 용기가 나지 않았고, 취업을 하기에는 공부에 미련이 남아 좋은 마음가짐으로 임할 수 없었다. 결국 그 절충으로 공부와 병행하면서 경력을 쌓아보기 위해 변호사 사무소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운 좋게 연락이 닿아 면접을 볼 수 있었다. 사무소는 자그마한 빌딩 3층에 위치해있는, 서류더미로 가득 차있는 곳이었다. 처음 보는 풍경에 놀라기도 잠시 면접이 시작됐고, 나이가 지긋하신 변호사님은 조금 횡설수설하셨지만 나를 좋게 봐주신 것 같았다. 당장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냐는 말에 나는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무소에 다른 이는 없었고 여직원만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은 나에게 1시간 남짓의 시간동안 인수인계를 해주셨다. 변호사님은 컴퓨터에 있어서 문외한이기에 모든 전자적 사무는 내가 담당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요즘은 대부분의 소송이 전자적으로 진행되는 만큼 내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그런데 여직원분의 말투나 행동이 마치 내일부터 오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기에, 내가 그 부분을 물어보자 본인은 해고당해서 더 이상 출근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당황했다. 그럼 이 사무소에서 내가 혼자 일하는건가? 내가 실수하면 누가 교정해주는거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내가 해야하는 일인데?
전부 처음 듣는 단어들인지라 무슨 소리인지도 몰랐지만, 나는 연신 예, 예하며 펜을 끄적였다. 갑작스럽게 전개되는 상황 속에 나는 머리가 뜨거워졌다. 이 정도만 알고 있으면 될 거라며 얘기를 마칠 때 즈음, 그 분은 변호사님이 하시는 말씀 곧이 곧대로 믿지 말라며 나에게 귀띔을 주고 사무소를 나가버렸다. 그러자 변호사님은 내 어깨를 움켜쥐시더니 방금 나간 여직원의 욕을 시작했다. 멍청하다느니, 친구도 없다느니, 누가 듣기에도 모욕적인 말들을 내뱉었다. "우리 승우씨는 잘할 거라고 믿어요."하는 그 한 마디에 나는 떨떠름했다.
얼떨결에 따라간 저녁 회식 자리에서 변호사님과 단둘이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변호사님은 본인이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당신을 만나서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 강조하시다, 여직원의 뒷담화를 이어나가셨다. 나는 조용히 웃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저 비위를 맞추며 술잔만 채웠을 뿐이다. 세 달만에 마신 술에 취기가 올랐지만 취하고 싶지 않았다. 한 잔 마실 때마다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가게에는 사장님의 따님께서 직원으로 계셨는데, 변호사님이 나랑 한 번 만나보는게 어떠냐며 두 분이 하하호호 이야기했다. 나이 차이는 9살이었다. 그 분께서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내게 추파를 던졌다. 나는 웃으며 술잔만 비웠다.
집에 가는 길, 지하철에 올랐다. 처음 타보는 퇴근 지하철은 사람들로 가득해서 숨을 쉬기 어려웠지만, 방금의 술자리보다는 숨이 트였다. 핸드폰도 꺼내지 못한 채 손잡이를 잡고 덩그러니 서있는데, 갑자기 시야가 흐려졌다. 그제서야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무서웠다. 이 모든 상황이 두려웠다. 어딘가에 기대고 싶었지만 사람으로 가득 찬 지하철에 내가 기댈 어깨는 없었다. 나는 이를 꽉 깨물고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래도 시야는 더욱 흐려지기만 했다.
잠을 이루지 못해 비몽사몽 첫 출근한 오늘, 나는 지하철을 반대로 탔다. 시간관리가 철저하다고 자기소개서에 적어냈는데, 첫 출근부터 지각을 하게 되면 무슨 소리를 들을까 겁이 났다. "10분 정도 늦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문자를 남기고 계속해서 달렸다. 날이 선선한데도 땀이 주륵주륵 흘렀다.
그렇게 도착한 사무실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뒤늦게 찾아본 인수인계 파일에 '변호사님은 출근을 늦게 하신다'고 적혀있었다. 나는 숨을 고른 다음, 절차대로 신문을 나르고, 요구르트를 변호사님 자리에 둔 뒤, 어제까진 다른 사람의 자리였던 곳에 앉았다. 컴퓨터의 모니터 곳곳에 붙여진 포스트잇에는 내가 앞으로 해야할 일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지만, 나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정신 차리라며 스스로에게 면박을 줬다. 출근 후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변호사님이 수임 중인 사건기록의 열람이었기에, 나는 주섬주섬 인수인계 파일을 읽으며 인터넷을 유영했다. 마침내 찾아낸 사이트에서는 열람을 위해 변호사님의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했다. 하지만 인수인계 파일 어디에도 그런건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다시 머리가 뜨거워졌다. 바탕화면 모든 파일을 찾아봐도 관련된 정보는 없었다. 나는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땀에 옷은 흠뻑 젖어 의자에 등을 붙일 수 없었다. 불쾌감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다,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 때까지도 변호사님은 내 문자를 읽지 않으셨다.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밀려드는 생각은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걸까하는 스스로를 향한 혐오였다. 그런 생각으로 귀결될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첫 직장으로 내게 좋은 환경이 아니었고, 일하게 된다면 겪게 될 스트레스가 클 것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나쁜 생각을 치워낼 수 없었다. 쌓여온 실패 속에 내겐 작은 성공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또 다시 실패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나는 생각이 난다.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뭘 하든 잘할 거라고 이야기해줬으면 한다. 검은 것들을 작은 빛으로 몰아내주길 바란다. 결국 또 어리광을 부린다. 그럴수록 비참해진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다시 밤이 온다. 나만의 밤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