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적이란 말은 과격하다. 일방의 의지는 묵살한 채,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존재를 묶어낸다. 그리고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도록 하여,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만든다. 필연은 '유일한 결과'의 도출을 목적으로 한다. 모든 원인이 하나의 결과를 위한 충분조건이라는 것이다. 결국 필연 속에서 자유의지는 힘을 잃는다. 욕망이 아닌 단순한 운명이 나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자유는 좌절된다.
필연의 반대인 우연은 어떨까. 이 세상 모든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라면? 태어난 이후 모든 일이 우연이라는 창을 통해 비추어진 것이라면? 이를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자유를 다시 손으로 가져올 수 있겠지만, 이내 '허무'라는 새로운 장애물을 맞닥뜨리게 된다. 우연 속에서 모든 원인은 필요원인으로 나타난다. 선행사건과 후행사건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우연 속에서 확신을 잃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운명과 허무, 둘 중 우리는 택일을 해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자유와 확신 모두를 손아귀에 넣어내고만 싶다. 이기적이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필연과 우연을 양립시켜야만 한다.
필연은 우연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수많은 필연이 만들어낸 결과 역시,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 불러야만 하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이들의 운명이 서로 엮여서 만들어진 붉은 실뭉치는, 하나의 타래가 되어 풀리지 않는다. 그것은 단단히 얽혀, 다른 도움 없이는 세상을 향해 다시 퍼질 가능성이 없는 것들이다. 우리는 그 도움 주는 이를 '신'이라 부르기로 했다. 오직 신만이 자유롭기에, 필연은 우연이 될 수 없다.
우연은 필연으로 치환될 수 있을까? 우연의 연속을 생각해 보자. 우연히 태어나, 우연히 좋은 부모님을 만나고, 우연히 자라서, 우연히 사랑하고, 우연히... 다시 우연히... 그리고 우연히 죽는다. 삼라만상 모든 일이 우연이라면, 이 결과를 우연이라 불러야만 할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선택은 다시 선택을 낳는다. 그리고 이는 개별 인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이유이다. 계속되는 갈림길의 상황에서의 계속되는 선택을 통해, 우리는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해당 갈림길이 주어지지도 않았을뿐더러,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나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 보장할 수 없다. 더욱이 갈림길은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지금 스스로가 걸어온 길은, 그 누구도 걸어오지 못한 특별한 길이기에 너와 나는 특별하다.
세상 모든 이들이 각자의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수많은 우연으로 만들어진 나라는 존재는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우연의 연속이 만들어낸 결과는 역설적으로 우연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간단한 사고실험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사람 A를 머나먼 과거로 되돌려 어린 a로서 다시 삶을 살아가도록 해보자. 시간이 흐른 후, a는 A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우연의 연속이라 가정한 세상 속에서, a의 결과는 A로 국한되지 않는다. A-, A--, A--- 등 a는 다양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인이 된다. a는 우연 속에서 필요조건이기에.
결국 나를 포함한 세상 모든 존재는 우연으로는 다시 만들어질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리고 이 '유일한 결과'는 곧 필연으로만 나타날 수 있다. 나를 만들어온 선택들이 우연이더라도, 정확히 현재라고 지칭할 수 있는 때에, 우리 모든 존재는 필연적인 존재가 된다. 끝이 없는 우연은 곧 필연이다.
물론 그렇다고 허무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연과 필연의 양립은 차치하고서라도, 우리의 선택은 여전히 우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통해, 이내 만들어질 나라는 존재가 필연적임을 인지한다면, 그 불확실은 분명 이전보다 덜해져 스스로를 안정케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연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필연적이다. 두려움에 선택을 주저하지 말자. 끝이 없을 것 같아도 괜찮다. 마음 가는 대로 살아도 된다. 다른 이의 시선은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렇게 만들어진 너와 나라는 존재는, 특별할 테니까.